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비다스 사보니스 (문단 편집) === NBA 이전 === 1964년 12월 19일에 당시 소련령이었던 [[리투아니아 공화국]]의 [[카우나스]]에서 출생, 13세부터 농구를 시작하여 15세부터 소련 유소년 대표팀의 일원으로 출전하게 되었다. [[파일:external/static4.krepsinis.net/09d1ee7b0ac8699866af7768b5f31fdb.jpg]][* 사보니스 뒤에서 자리싸움을 하고 있는 선수는 블라디미르 트카첸코(Владимир Ткаченко)로 1970~80년대 소련 국대팀을 대표하던 센터이자 [[PBC CSKA 모스크바]]의 레전드 센터이다.] 그가 17세 되던 1981년에 고향팀이자 당시 소련 내 강팀인 [[BC 잘기리스]][* 흔히들 잘기리스 [[카우나스]]라고 한다. 리투아니아 리그 최다 우승(통산 23회)을 자랑하는 명문팀이기도 하다.]에 입단하여 당시 감독이던 블라다스 가라스타스(Vladas Garastas)[* 1932년 파크루오이스구 린쿠바 출생. 1952년 비르자이 체육관에 입소한 후 같은 해 잘기리스에 입단하여 3년을 뛰었고, 1956년 비르자이 체육관에서 코치로 일하다 1959년부터 11년간 비르자이 지구 체육위원장, 1971년부터 7년 간 비르자이 유소년 체육학교 교장과 지역 농구팀 감독 등을 지내다 1979년부터 10년 간 잘기리스를 지휘하여 소련 리그 우승 3회, 유로리그 준우승, FIBA 인터컨티넨탈 컵 우승을 각각 차지했고, 사보니스 외에 발데라마스 호미츄스, 리마스 쿠르티나이티스 등 국가대표급 선수들을 배출했다. 이후 터키 갈라타사라이, 슬로바키아 BC 프리에비자 감독을 각각 거치다 1992년부터 초대 리투아니아 대표팀 감독을 5년 동안 맡으며 [[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]] 및 [[1996 애틀랜타 올림픽]]에서 동메달을 각각 2번 차지했고, 1995년부터 8년 동안 리투아니아 농구감독 협회 회장도 지냈다. 1999년 BC 알리타 감독을 끝으로 지도자 일선에서 물러나 2003~2011년까지 제3대 리투아니아 농구 협회 회장으로 재직했다.]의 지도 하에 점차 성장하여 잘기리스에서 뛰던 9년 동안 유럽의 크고 작은 대회에서 족적을 남기게 되었고, [[1988 서울 올림픽]]에도 소련 대표팀의 일원으로 출전하여 준결승전에서 [[데이비드 로빈슨]]이 이끌던 미국 대표팀[* 이때 미국팀에는 로빈슨 뿐만 아니라 88년 NBA 드래프트 1번픽 대니 매닝, 5번픽 [[미치 리치몬드|미치 리치먼드]], 14번픽 댄 멀리 등등 당시 대학 최고의 선수들이 즐비했다. 참고로 현 [[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]]의 감독 [[스티브 커]]가 이들의 드래프트 동기이다. 한편, 로빈슨은 1987년에 이미 1번픽으로 지명되었지만 2년간 [[미합중국 해군|해군]]에서 군복무하는 도중 대표팀에 소집된 상태였다.]을 이기고, 결승전에서 유고슬라비아 대표팀[* [[드라젠 페트로비치]], [[토니 쿠코치]], [[블라디 디박|블라디 디바치]]같은 훗날의 NBA 선수들이 다수 포진된 강팀이었다.]마저 이기면서 금메달을 땄다. 잘기리스에서 뛰고 있던 1985년 [[애틀랜타 호크스]][* 그 해에 호크스는 NBA 역사상 처음으로 소련 대표팀과 친선경기를 했다.]가 전체 77위로 사보니스를 지명했으나 너무 어려서[* 당시 규정은 외국인선수의 경우 만 22세여야 지명이 가능했다. 이는 2003년 드래프트를 앞두고 만 18세로 조정이 됐고, 2007년 드래프트부터 NBA가 전체 신인들의 최소 나이 제한을 19세로 조정하게 된다. 여담이만 2003년 나이 조정을 한 이유 중 하나가 이때 최대어 중 하나로 여겨졌던 [[다르코 밀리시치]](2순위) 때문이란 설도 있는데 정작 밀리시치는 [[디트로이트 피스톤즈]]에서 드래프트 동기들에 비해 우승반지만 가장 빨리 얻고(2004년) 그뒤로 완전히 망했다(…)] 무효가 되었고, 이후 1986년 NBA 드래프트를 통해 1라운드 24위로 [[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]]에 지명되었지만, 당시는 [[냉전]] 시기라 소련을 포함한 동유럽 선수들이 NBA 진출을 할 리 만무한 데다가 사보니스 본인도 아킬레스 건 부상으로 시름시름하면서 결국 포틀랜드 입단은 9년 뒤에나 이루어지게 된다. 다만 지명한 포틀랜드 구단에서 1987년 그의 심각했던 발목부상을 치료하기위해 잠시 미국 땅을 밟았는데, 이 때문에 1988년 미국농구 대표팀의 감독인 존 톰슨[* [[조지타운 대학교]]의 前 감독으로 [[패트릭 유잉]], [[디켐베 무톰보]], [[알론조 모닝]], [[앨런 아이버슨]] 등을 지도하였다.]은 포틀랜드 구단을 '매국노'라 하기도 했다. [[파일:external/www.tirandoafallar.com/sabas.jpg]] [[동유럽 혁명|1989년 동구권이 붕괴되고]] [[고르바초프]]의 개방 정책이 이루어지고 있던 시기에 사보니스는 NBA가 아닌 유럽 최고의 리그 중 하나인 [[스페인]] [[리가 ACB|리그]]를 택했고, 그는 CB 바야돌리드에서 3년간 활동하다가 1992년부터 [[레알 마드리드]]에서 3년간 활동하며 2번의 리그 우승(1994, 1995), 1번의 코파 델 레이 우승(1993), 1번의 유로리그 우승 (1995)을 이루었고, 특히 1994/95 시즌에는 평균 22.8 득점, 13.2 리바운드, 2.6 블락, 2.4 어시스트를 기록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